[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2년 차에 관세를 앞세운 한국 압박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습니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 과정의 전제였던 반도체 '최혜국 대우' 원칙은 사실상 효력을 잃는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한국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판단이 '대만의 대미 투자 규모'를 기준선으로 삼는 구조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불리하지 않게 할 '의향'…결정권은 '미국'에
19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현지시간으로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합니다. 이번 포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스티브 윗코프 트럼프 대통령 특사 등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번 행사는 러트닉 장관이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고 싶은 기업은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겨냥한 발언을 내놓은 직후입니다. 이는 한국이 진행 중인 대미 투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메모리 반도체 생산 시설 자체를 미국에 구축하라는 요구입니다. 결국 국내에 지을 공장을 미국에 지으라는 압박으로까지 수위가 올라간 셈입니다.
여 본부장은 포럼에서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미국 측 인사와 접촉하며,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합의한 '불리하지 않은 반도체 관세' 원칙을 토대로 우리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은 없습니다. 한·미 협상 타결 후 백악관 팩트시트(Fact Sheet·설명자료)에는 문서에는 '한국 반도체에 대해, 한국과 같거나 더 큰 교역 규모를 가진 다른 국가의 반도체에 적용되는 조건보다 불리하지 않게 하겠다'는 문구가 담겼습니다.
다만 해당 문구는 미국이 그렇게 할 '의향이 있다'는 수준의 표현으로, 이를 한국 반도체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확정적으로 보장한 조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적용 기준과 범위는 관세 집행 단계에서 미국 정부 재량에 맡겨집니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는 지난 1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이 대만과 합의한 반도체 관세 면제 기준을 한국에도 적용하느냐'는 <연합뉴스> 질의에 "국가별로 별도 합의"(separate agreements for separate countries)를 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대만에 적용하는 기준을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별도 협상을 통해 그 내용을 결정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사실상 최혜국 대우가 물 건너갔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16일(현지시간) 마이크론 반도체 공장 착공식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오른쪽 두번째)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마이크론)
관세 후속협상 '기정사실'…기준은 '미국 내 공장 수'
결국 한·미 간 반도체 관세 후속 협상은 기정사실화됐습니다. 문제는 협상이 미국이 조건을 제시하면 한국이 이에 맞춰 대응해야 하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미국이 사실상 기준선으로 삼은 것은 대만의 투자 모델입니다.
미국은 지난 15일 대만과의 관세 협상을 타결했습니다. 대만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20%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대만은 기업이 2500억달러(약 368조원)를 직접투자하고 대만 정부는 2500억달러 규모의 신용보증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2500억달러 직접투자에는 대만 TSMC의 미국 공장 건설 등이 포함됩니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6개를 이미 완공했거나 증설 중입니다. 여기에 더해 5개 공장을 추가로 짓겠다는 계획을 내놓으며 대미 투자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이 투자 패키지가 관세 부담을 낮추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TSMC는 메모리 반도체가 아닌 파운드리(위탁생산) 전문 업체이지만, 메모리와 파운드리의 구분은 미국의 관세 논리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공장을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가 관세 적용의 판단 잣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가운데서도 메모리를 겨냥한 배경에는 '시장 구조'가 있습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글로벌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67%를 차지합니다. SK하이닉스는 매출의 대부분이 메모리에서 나오고, 삼성전자 역시 반도체 사업에서 메모리 비중이 가장 큰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양사 실적 구조 자체를 흔드는 변수가 됩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마이크론 제품과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빅테크에 메모리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을 공급해오던 한국의 핵심 시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는 한국 메모리 반도체 생산 공장이 없습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오스틴에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370억달러(약 54조원)를 투자해 가동을 앞둔 테일러 공장 역시 파운드리입니다. SK하이닉스가 38억7000만달러를 들여 미국 인디애나주에 건설 중인 시설은 후공정인 'HBM 패키징' 공장입니다.
그러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이미 경기 용인시 일대에 각각 600조원, 360조원 규모의 'K반도체 벨트' 구축 사업을 추진 중이라 추가 투자 여력이 없습니다.
미국 정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산업 생태계를 미국 내에 구축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반도체 설계를 비롯한 지식재산권(IP)은 이미 엔비디아와 구글 등 미국 기업이 주도하고 있지만,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서버는 미국 밖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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